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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0   (사)한국미술협회   2007-08-28
  <파리지앵>   4955


<파리지앵> 2007년 8. 20. 출간


여행만으로는 볼 수 없는 파리지앵의 일상과 속살
젊은 디자이너가 발견한 ‘공존의 미학’

죽음에 직면한 순간 이외에 일상에 새로운 애착을 느낄 수 있는 계기는 바로 여행이다. 그리고 우연한 여행은 때로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기도 한다. 『파리지앵』은 스물아홉에 우연히 파리에 여행을 갔다가 그 도시에 매료되어 정착을 결심한 한 디자이너가 13년을 파리지앵으로 살면서 오감으로 체득한 파리와 파리지앵의 흥미로운 진면목을 생생하게 담아낸 책이다.

발터 벤야민은 일찍이 파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파리는 거울의 도시다. (…) 그 어느 곳보다 자신을 잘 비춰주는 도시가 파리다.’ 그런가 하면 발자크는 이렇게 파리를 예찬했다. ‘대부분의 파리지앵은 먹고사는 일처럼 무의식적으로 파리를 산책한다. 아, 파리를 배회하는 것은 얼마나 행복하고 맛있는 실존인가!’ 그리고 1993년 겨울, 첫 발을 들여놓자마자 단박에 파리와 사랑에 빠진 『파리지앵』저자의 눈에 비친 파리는 ‘화장실의 물 내리는 방식이 한 집 걸러 다른 도시, 뭐든지 모아서 벼룩시장이든 뮤제든 보내야 직성이 풀리는 곳, 바캉스라는 주술로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도시, 아이든 어른이든 날씨와 인생을 입에 달고 사는 곳, 물건도 사람도 비슷한 것을 찾아보기 힘든 도시’로 새롭게 묘사된다.

그러나 다양한 인종과 개성, 아름다움과 추함이 섞인 곳, 모든 사람이 관객이 될 수 있고, 사람들의 시선이 끊임없이 교차하며 그 시선을 즐기는 도시 파리의 내면과 속살을 보기까지에는 녹록지 않은 시간과 애정이 자리하고 있다.
1964년 서울에서 태어나 홍익대 대학원 산업디자인학과를 졸업한 뒤 광고정치회사에서 아트디렉터로 일하다가 스물아홉에 파리의 타이포그래피 국립 아틀리에에서 파리 생활을 시작한 동양의 앳된 이방인, ‘더불어 사는 것은 이론으로 배웠고 몸으로는 팔꿈치로 옆사람을 제치고 나가는 법을 배운, 인생이란 늘 도전과 쟁취였지 즐거움이 아니었던, 헝그리 정신으로 충만한’ 한국의 디자이너에게 ‘나와 다른 태도로 인생의 즐거움을 누리고 사는’ 파리지앵의 삶은 쉽게 적응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은 아니었다.
‘링에서 내려온 권투선수처럼’ 바캉스의 많은 시간을 ‘과연 이렇게 살아도 되나?’ 수없이 자문했고, ‘메트로에서 누군가 무례하게 밀쳐도 그러려니 생각하는 사람들, 손수레를 끌고 슈퍼마켓에 가서 항상 똑같은 상표를 고르다가 건수를 잡아서 타인과 집요하게 말을 섞는 혼자 사는 노인들, 친절한 서비스보다는 손님들의 예의범절을 가르치는 일로 사명감을 느끼는 듯한 자존심 강한 점원들, 개를 산책시키면서 은근슬쩍 길거리에 똥을 뉘다가 들켜도 당당하게 맞장을 뜰 수 있는 뻔뻔한 개주인, 멋지게 차려입고서도 허벅지를 드러내는 데 주저함 없이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거리를 누비는’ 다양한 파리지앵들 틈에서 프랑스어로 물건값을 깎고, 말싸움을 하고, 파리지앵과 결혼해 파리 병원의 분만실에서 아이를 낳으면서 차츰 저자는 파리라는 도시에서 ‘공존의 미학’을 발견하게 된다.
누구보다도 다양함과 공존할 줄 아는 기술을 가진 파리지앵과 일상을 공유하면서 비로소 ‘막연한 낭만과 동경’을 걷어내고 파리와 ‘진짜 사랑’에 빠지게 되는 그 과정은 마치 첫눈에 반해 무작정 연애를 시작한 연인이 결혼하고 오랜 시간 천천히 서로에 대해 깊이 알아가는 가운데 상대의 진면목에 새롭게 빠져드는 이상적인 부부의 모습과도 닮아 있다.

짧은 여행이 아닌, 오랜 시간 파리에서 살면서 거닐었던 골목골목과 파리지앵들의 일상, 내면의 풍경들로 가득한 이 책을 읽어가다 보면 파리라는 도시가 주는 매력의 실체와 그 안에서 인생을 즐기고 누리며 살아가는 파리지앵들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빨리빨리’와 ‘좀더 뜨겁게’를 외치는 현재 우리네 삶이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새삼 되돌아보는 시간을 선물처럼 받아안게 될 것이다.

이 책에는 에펠탑이 없다. 파리지앵의 육성이 가득하다
열세 명의 파리지앵, 삶을 고백하다

파리에 가면 누구나 에펠탑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에펠탑으로 대변되는 파리의 상투성을 들어낸 자리에 지금껏 누구도 들려주지 않았던 파리지앵의 생생한 육성을 채워넣었다.
그가 만난 열세 명의 파리지앵parisiens은 화려한 명성을 얻었거나 사회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사람들이 아닌, 빵 가게나 메트로에서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독신여성, 부부, 예술가와 공무원, 화려함보다는 자유로움을 꿈꾸는 파리지앵, 실직자이지만 열정을 가지고 자기방식의 삶을 꿈꾸는 행복한 파리지앵이 그들이다. 저자는 10년 이상 사귄 이 파리지앵 친구들과 식탁에 앉아 포도주를 홀짝이거나 함께 여행하면서 이들의 이야기를 기록해나갔다.

루까는 타이포그래피 국립 아틀리에에서 만난 친구이자 타이포그래피 국립 아틀리에로 저자를 이끈 사람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엄마(오드리 헵번)를 가졌지만 그 사실로 행복하지 않았던 그를 애틋하게 추억한다.

바스티유에 사는 마크와 마크탐탐은 아미(Ami, 친구)와 뽀뜨(Pote, 진짜 친구)의 차이를 알게 해준 친구들이다. 23년간 변함없는 우정을 쌓으며 외장메모리처럼 상대의 기억을 알뜰하게 기억해주는 이들은 프랑스 재경부 안에 있는 ‘문화도서관’에서 사람들에게 영화 DVD와 책, 음반을 대여해주는 일에서 큰 기쁨을 느낀다.
“난 이 일을 하는 우리를 ‘석유왕’이라고 부르지. 기름 대신에 우린 수천 장의 영화와 수만 장의 음악을 맘껏 누릴 수 있고, 그걸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거야. 파는 것이 아니라고. (…) 여기에는 순수하게 나눔의 즐거움만 있어.” 이들은 저자에게 항상 이런 질문을 남긴다. “그런데 넌 정말 뭘 더 바라는데?”

바티뇰에 사는 폴은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세계를 떠돌며 사진을 찍던 그는 프랑스 여성을 만나 파리에 정착한 파리지앵이다. 그는 사진을 통해 파리라는 도시를 사유한다.
“파리는 시각적인 풍부함이 있는 도시야. 게다가 매일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도시지. (…) 우연히 어떤 골목에서 아주 오래된 사진을 파는 가게를 발견했어. 브르따뉴 거리였을 거야. 사진작가인 주인이 벼룩시장이나 다락방을 처분하는 곳마다 찾아다니며 사 모은 오래된 사진을 파는 곳이야. 모르는 사람들의 가족사진, 여행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한두 시간 무심한 즐거움에 빠질 수 있어. 이런 즐거움을 발견하는 곳이 파리야.” 한번도 지름길로 달려가본 적이 없다는 그는 “죽기 전에 자신과 근접한 모습을 발견하고, 내가 걸어온 길이 단지 잘못된 길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꺄뜨린과 삐에르는 8년 전에 헤어진 파리지앵 커플이다. 한국 음식을 좋아하는 꺄뜨린은 현재 파리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고, 엔지니어 출신인 삐에르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 자발적으로 욕망의 피라미드 밖으로 나와 작은 도시 니오르에서 20년 된 낡은 차 뿌조를 몰며 아날로그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일을 찾고 있을 때 등에 디스크와 왔어. 하루 만에 하반신을 움직일 수 없게 되었지. 문득 그때 내가 휠체어에서 나머지 인생을 보내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미친 놈처럼 일을 하는 것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마지막 물리치료를 받고 병원에서 나오는 날 마음먹었지. 이제부터는 나를 위해 인생을 살자고.”

몽후즈에 사는 소피는 어린 딸과 함께 살아가는 비혼모다. 8년 전 바람을 피운 아이의 아빠를 조용히 내쫓은 후 혼자서 씩씩하게 삶을 꾸려나가고 있다. ‘내 남자의 결혼’ 소식을 전하며 호탕하게 웃는 그녀는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고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찾는 것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나간다.
“만약에 혼자 살기 두려워서 그냥 같이 사는 삶을 택했다면 내 자신에게 부끄러웠을 거야. 사랑은 시작할 수도 있고 끝날 수도 있어. 하지만 그 다음의 선택은 철저하게 자유로운 선택이야. 난 내 선택을 자랑스럽게 생각해.”

몽마르뜨르에 사는 필립은 국립 아틀리에 시절에 만난 친구다. 파리지앵답지 않게 모든 것을 빨리 결정하고 빨리 실행에 옮기는 그는 열정적으로 디자인 회사를 운영하며 그 사이에 적절히 쉼표를 찍어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1년에 한 달 정도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필요해. 그때는 핸드폰도 컴퓨터도 가져가지 않아. 보르도의 포도밭 사이를 뛰면서 생각의 전원을 완벽하게 끄는 거야.”

막쉐 달리그르에 사는 꺄띠는 딸아이와 함께 자신이 선택한 삶에 책임을 지는 파리지앵이다. 메종과 결혼이라는 구속에 얽매이지 않는 그녀는 강한 여자만이 누릴 수 있는 선물인 자유로움을 누린다.
“난 시골에 메종 같은 것을 사서 묶이고 싶지는 않아. 경제적인 여유가 있다면 전혀 다른 세계로 떠나서 다른 문명과 접해보는 것이 내가 꿈꾸는 가장 큰 즐거움이야. 아나엘이 조금만 더 크면 사막에 꼭 데려가고 싶어.”

몽또흐고이에 사는 다비드는 백남준의 <굿모닝 미스터 오웰>, <마그리뜨 뒤라스 다큐멘터리> <그레이스 켈리 다큐멘터리>를 찍은 작가다. 2002년 아르떼에서 방영한 <한국의 밤> 다큐멘터리를 찍기도 한 그는 열정적으로 작업에 임하지만 한편으로는 파리지앵답게 몇 년에 걸쳐 천천히 집을 수리하는 느긋함도 있다. 철거문화에 익숙한 저자가 의아해하자 그는 이렇게 반문한다.
“집 고치는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지. 그건 일종의 열정이라고. 예를 들면 사랑 같은 거야. 사랑하는 것도 과정이 좋은 것이지 반드시 완성을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니잖아?”

라뷔또까이에 사는 이자벨과 벵상 부부는 저자가 목격한 가장 행복한 파리지앵 커플이다.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지만, 늘 입던 청바지에 방수가 되지 않는 점퍼, 그리고 낡은 스웨터 차림의 벵상과 유행에 한참 뒤떨어진 선글라스를 버리지 않는 이자벨은 자신들이 진정 원하는 것에 아낌없이 투자할 줄 아는 삶의 지혜를 터득하고 있다. 레시피 없이도, 복잡한 소스 없이도 충분히 맛을 살리는 벵상의 요리처럼 그들의 삶 또한 담백하다.
“내가 하는 요리는 단순한 거야. 복잡한 소스를 사용하지 않고 그저 소금으로 재료를 살리는 그런 맛이야.”

올리비에는 저자의 남편이다. 서로 다른 별에서 온 사람이자 가장 가까이에서 본 파리지앵인 그와 엎치락뒤치락 살아가는 가운데 저자는 한국과 프랑스의 문화 차이를 때론 실감하며 때론 뛰어넘으며 파리지앵의 삶에 동화되어가는 과정을 유머러스하게 펼쳐보인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파리지앵이란 파리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방식을 가지고 파리에 적응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 열세 명의 파리지앵이 전하는 메시지는 다름아닌 ‘인생의 즐거움을 누리고 나누는 것’ ‘타인의 시선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추구하는 것’ ‘자유롭게 선택하고 선택에 책임을 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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